“전쟁에서는 눈에 보이는 충돌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승패를 가른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이제는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섰습니다. 최근 중국이 미국산 수입품에 부과했던 최대 125%의 ‘살인적 관세’ 일부 품목에 대해 면제 목록을 만들고, 이를 자국 기업들에게 ‘조용히’ 알렸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단순한 행정 절차로 보기엔 그 타이밍과 방식이 예사롭지 않죠. 이건 현재 진행형인 경제 전쟁터에서 중국이 꺼내든 새로운 전략 카드, 즉 ‘전략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탄입니다.
‘공식 발표’ 대신 ‘비공식 통보’, 왜?
중국 정부가 이 민감한 관세 면제 목록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기업들에게만 살짝 알려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중국 특유의 계산법이 깔려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국을 향해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는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안으로는 자국 경제의 숨통을 틔워줄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죠.
“중국에게 공개적인 양보는 곧 ‘약점’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국 경제에 꼭 필요한 물품까지 막아버릴 순 없죠. 체면은 지키면서 실리를 챙기는, 전형적인 중국식 해법입니다.” – 국제무역 전문가 장웨이 박사
이 ‘비공식 통보’에는 여러 겹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우리 기업부터 살리고 보자: 당장 필요한 물건은 들여와서 기업들이 멈추지 않게 하겠다.
- 협상 카드는 그대로: 공식 양보가 아니니, 미국과의 협상에서 여전히 강하게 나갈 수 있다.
- 아픈 곳만 골라 때린다: 미국 전체를 압박하기보다, 특정 산업에는 관세를 유지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쏙 빼오겠다.
면제 목록엔 무엇이? 중국의 속내가 보인다
면제 목록 전체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품목들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 첨단 반도체와 장비: ‘기술 자립’을 외치지만, 아직은 미국의 최첨단 기술 없이는 버티기 힘든 현실을 인정.
- 일부 농산물: 14억 인구의 식량 안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문제.
- 의약품 원료: 자국 제약 산업과 국민 건강에 직결되는 필수 요소.
- 특수 화학제품: 중국 내 생산이 어려운, 부가가치 높은 핵심 소재.
- 항공기 부품: 자체 항공 산업 육성을 위해 아직은 필요한 핵심 부품들.
이 목록은 중국의 큰 그림(장기 전략)과 당장의 현실(단기 필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기술 자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현실적인 의존성을 인정하고 관리하는 실용주의적 면모가 엿보이죠.
단순 대응 넘어선 ‘조용한 적응’ 전략
중국의 이번 움직임은 단순한 맞대응이 아닙니다. 장기전으로 굳어진 미중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용한 적응’ 전략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1. 장기전 대비, 체력 안배:
트럼프 2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며, 무조건적인 강경 대응보다는 ‘숨 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세게 나가면서도, 안으로는 경제적 부담을 덜어내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죠.
“2018년부터 시작된 1차 무역전쟁에서 중국은 전면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번엔 더 영리해졌어요. 모든 전선에서 싸우기보다,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데 집중하는 거죠.” – 베이징대 경제학과 리우 교수
2. ‘디커플링’은 아직 먼 이야기:
미국과의 완전한 경제 단절, 즉 ‘디커플링(Decoupling)’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셈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강조하는 ‘쌍순환(내수 중심 성장)’ 전략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특정 분야는 여전히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판단이죠.
3. 미국 내 여론 흔들기: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특정 미국 산업 제품에 관세를 면제해주면, 해당 미국 기업들은 트럼프식 고율 관세 정책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겠죠. 중국은 이를 통해 미국 내부의 정책 논쟁에 영향을 미치려는 계산도 깔고 있을 수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고 있습니다. 특정 산업을 관세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구출’해줌으로써, 미국 내 강경론자들의 입지를 좁히려는 전략이죠.” – 무역정책 분석가
4. 정보는 곧 무기:
‘비공식 통보’는 정보 자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정확히 어떤 품목이, 얼마나, 어떻게 면제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정부와 기업들이 중국의 진짜 속내와 다음 수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안개 속에 길을 감추는 전략이죠.
중국의 다음 카드는?
이번 관세 면제는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중국은 더 복잡하고 정교한 수를 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 ‘채찍’과 ‘당근’의 병행: 미국의 아픈 산업엔 계속 관세 압박을, 자국에 필요한 분야는 유연하게 풀어주는 전략.
- 우리 편 늘리기: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일대일로 등을 통해 미국 외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 강화.
- 내수 시장 키우기: 소비를 늘리고, 수입품을 대체할 자국 산업 육성에 박차.
- 우회로 찾기: 관세를 피하기 위해 제3국을 통한 수출입 루트를 더 교묘하게 활용.
글로벌 기업, 안테나를 세워라
이런 중국의 ‘물밑 작업’은 글로벌 기업들에게도 큰 숙제를 던져줍니다.
- 정보 채널 다각화: 공식 발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현지 네트워크 등 다양한 정보 루트 확보가 필수.
- 공급망 이중화(Dual Supply Chain): 미중 양국의 정책 변화에 대비해, 한 곳에 ‘올인’하지 않는 유연한 공급망 구축.
- 현지 파트너십 강화: 특히 중국에서는 ‘꽌시(关系)’가 중요합니다. 현지 파트너와의 긴밀한 협력이 숨겨진 정보 접근에 유리할 수 있습니다.
- 시나리오 경영: 관세 정책 변화 등 여러 가능성에 대비한 플랜 B, 플랜 C 준비.
한국에게는 위기이자 기회
미중의 복잡한 수 싸움은 한국에게도 양날의 검입니다. 하지만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 틈새 공략: 미중 갈등으로 생긴 공급망의 빈틈을 파고드는 전략적 포지셔닝.
- 균형 외교: 기술은 미국과, 시장은 중국과 협력하는 섬세한 줄타기.
- 기술·안보 연계: 미국의 기술 동맹 요구와 중국 시장 접근성 사이에서 국익을 극대화하는 균형점 찾기.
결론: 관세 전쟁, 이제는 ‘조용한 체스 게임’
중국의 125% 관세 면제 목록 비공식 통보는, 미중 무역 전쟁이 초기의 요란한 설전 단계를 지나, 훨씬 더 치밀하고 정교한 ‘체스 게임’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강경한 말들 이면에, 각자의 핵심 이익을 지키려는 복잡한 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런 시대에 살아남고 성공하는 기업과 국가는, 표면적인 언어와 실제 정책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고, 장기적인 비전과 단기적인 적응력을 동시에 갖춘 플레이어가 될 것입니다. 중국의 이번 ‘물밑 움직임’은 21세기 경제 패권 경쟁이 단순히 관세율 숫자를 넘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게임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무역 전쟁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짜 게임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중국의 ‘조용한 한 수’는 그 새로운 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